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
1967년 1월 14일 박 대통령이 부산시와 경남 도정을 살피고자 초도순시차 방문했을 때, 오후 2시 시청상황실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김대만 부산시장의 시정현황 브리핑이 있었다. 브리핑을 듣고난 박 대통령은 건설자금을 중앙에만 의존하지 말고 시에서 시민에게 높은 이자를 붙인 공채를 발행하여 그 돈으로 각종 건설사업에 투자하도록 지시한 바 있다. 그날 4시에는 경남도청을 순시하여 도지사로부터 도정 전반에 걸친 브리핑을 들었다.
그날 부산 상공회의소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방문이 본래 계획되어 있지 않았다. 갑자기 오후 5시 20분, 수출진흥센터를 돌아보고 싶다는 박 대통령의 뜻을 전달 받았다. 본 상의에서는 상의의원을 비롯하여 부산 상공인, 경제인들이 상의 4층 회의실에 모여 대기하고 있었다.
5시 40분쯤 흑색 세단의 행렬이 직매장 앞에 멈추었다. 약 2시간 전부터 본 상의소 건물 주변에 몰려든 시민 환영객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열렬한 박수로써 환영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부산 상공회의소 강석진 회장을 비롯 박정관 부회장, 안범수 사무국장, 상공단체 대표, 경제인들의 영접을 받으면서 직매장으로 들어섰다. 직매장 입구에 모인 각 보도기관에서 배치된 카메라는 사진을 찍기 위해 붐비었고 장내는 회려하게 단장된 가운데 흥분된 분위기였다. 단정한 용모에 가운을 입은 종업원들의 예쁜 모습은 박 대통령으로 하여금 밝은 미소를 띠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진열된 우량국산품을 보고 치하했다. '대한기업사'에 들른 박대통령은 넥타이를 만지면서, 참으로 훌륭한 상품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넥타이가 얼나냐고 종업원에게 묻기도 했으며, 실제로 박 대통령 자신이 고른 회색 넥타이를 김대만 부산시장 얼굴에 가져가 대어 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박 대통령은 수출이 바로 국가발전이라는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박 대통령과 동행하고 있던 강석진 회장 이하 각계 인사들이 박 대통령이 고른 넥타이에 대해 호감을 표하자, 박 대통령은 넥타이값 500원을 주었고 종업원 김성렬 양이 넥타이를 포장해 드리며 거스럼돈 310원을 내어 드렸는데, 박 대통령은 "좋소, 좋소"하면서 다음 점포를 관람했다. '선경섬유'에 들른 박 대통령은 갈색잠바를 샀고 이밖에도 여러 상품이 진열되어 있는 직매장을 골고루 돌아보았다. 박 대통령은 직매장을 빠짐없이 둘러보고 무척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강석진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2층 전시장으로 안내하였다. 박 대통령은 〔원도우 그라스〕안에 정연하게 진열된 시내 50여개 업체에서 출품한 우량국산품을 시찰하고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안범수 사무국장으로부터 브리핑을 듣고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러한 것을 마련한 본 회의소 강석진 회장과 상공인들에게 노고를 치하하였다. 이어 박 대통령은 더욱 훌륭한 상품 만들기에 온갖 힘과 정성을 기울여 달라고 당부했다. 약 40여분 시간을 보낸 박 대통령은 강석진 회장과의 무언의 악수를 나누면서 해운대로 떠났다.
부산의 수출진흥센터의 개관은 수출업 육성이란 방향설정과 수출항구라는 대전제에 입각한 준엄한 시동이었다. 박 대통령이 각별히 관심을 보인 것은 수출진흥센터는 부산의 수출센터가 아니라 한국의 수출진흥센터로서 기여하고 그 사명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국 경제성장의 척도가 부산의 수출 산업 성장으로 판가름된다고 할 때, 부산 상공업계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강석진 회장 이하 부산 상공인에 대한 박 대통령의 관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1961.5.16 군사혁명 이후 부산 국제신문사가 경영난에 빠져 폐간 위기에 봉착한 적이 있었다. 강 회장은 국제신문 재건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국제신문의 재건에 노력을 경주한 이유는 국제신문이 지방신문으로서 그당시 부산에서 발행부수가 타 신문보다 월등히 많았고 부산이라는 지역적 이익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은 강석진 회장에게 국제신문의 재건을 주관하도록 의견을 제시한 바도 있었다.
곧 국제신문은 강회장이 주축이 되어 주주를 모집하였다. 럭키 구인회씨 다음으로 출자한 사람으로서는 방남준 씨와 김일준 씨, 정일봉 씨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당시 돈으로 180만원을 출자하였다. 강 회장은 주를 모아 국제신문이 재기할 수 있는 충분한 기틀을 마련한뒤 럭키그룹의 구인회 씨에게 경영권을 넘겨 주면서 부산지역 언론 창달을 위해서 국제신문의 재건을 당부하였다.
박대통령과 강회장은 경제를 살리기 위한 기술도입 없이는 부강한 국가를 재건할 수 없다는 일치된 사고를 갖고 있었다. 강석진 회장은 수출이 아니면 경제발전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동명목재가 수출수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강회장이 60년대와 70년대 수출 제일주의로 3년 연속 국내수출 1위를 차지한 것은 근검절약과 수출이 곧 애국이라는 철학의 결과였고, 박 대통령 역시 수출주도의 경제성장을 주장해왔다고 본다면 이는 분명 시각의 일치였다.
박 대통령이 부산에 연두순시차 내려왔을 때 "강 영감 같은 분이 몇 분만 더 계시면 우리 나라 경제가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도 이를 미추어 짐작할 수 있다. 그날 마침 강석진 회장이 교통관계로 회의장에 조금늦게 도착하여 뒷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박 대통령이 주위를 둘러 보고 강석진 회장을 보고는 자기 옆으로 오게 한 뒤 "공장은 잘 되요"라고 안부를 묻는 등 신뢰감 있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날 저녁 만찬회 석상에서 박 대통령은 강회장에게 "중국에서 무슨 박사 학위를 받았느냐"고 묻기에 "철학박사를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박 대통령은 "경제학 박사를 받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부언하자 강 회장은 "철학박사 속에 경제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라고 답변하니 박대통령은 "과연 박사는 박사구나" 하여 만찬장은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또한 영부인 육영수는 동명불원 창건 당시 강회장의 불사에 크게 기뻐하고 항상 노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영부인께서 외국사찰차 사찰을 둘러 볼 때마다 현지에서 엽서를 통해 격려와 참고될 글을 적어 보내 주기도 하였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재일 교포 문세광에 의해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맞아 서거한 후 온 국민은 애도와 증오를 가슴에 안은 채 장례식을 치러야만 했다. 강 회장은 남다른 슬픔을 지닌 채 영부인을 운구할 국화꽃 장례차를 동명목재에서 만들어 서울까지 가지고 갔다. 그 이후 실현은 못 되었지만 평소 육 여사의 숭고한 뜻을 받들고자 부산 성지곡 어린이 놀이터 부근에 1976년 8월 15일 고 육영수 여사상을 건립코자 계획 하였다.
육 여사상에 새겨질 글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고 육영수 여사께서는 그 성품이 온화, 후덕하시어 누구에게나 자애롭게 대해 주셨고 특히 불우한 사람에게나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항상 깊은 사랑을 기울여 오신 어머니 같은 분이었습니다. 이 부산 어린이회관도 여사의 그 어린이 사랑의 높으신 뜻에 의하여 세워진 것입니다. 평소 여사의 우아하시고 인자하시던 모습을 여기에 모시어서 길이길이 우리들이 우러러 여사의 숭고한 뜻을 받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서기 1976년 8월 15일 설계 동명목재상사 사장 강석진, 건립 부인 고고화 여사.
박정희 대통령과 강석진 회장과의 친분과계를 엿볼 때, 어떠한 정경유착의 흔적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들의 친분관계는 60년대와 70년대의 경제개발이란 국가적 과제를 두고 정계와 재계에서 이를 관철하는 시각의 일치를 통해 이루어진 지극히 순수하고, 따라서 매우 합당한 관계라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박정히 대통령 생존시 내내 지속된 것이었고, 또 변질될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