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수출산업의 기수
6.25 전쟁 이후 곳곳에서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합판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강송(强松)합판이라고는 하지만 동명제품은 품질이 한층 앞선다고 알려져 생산하기가 바빴다. 전국의 판매망에서는 선구금을 갖고 와서 출고를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공급이 수요에 못 미치자 수요자의 심리는 다른 회사 제품이 있는데도 동명목재 합판을 더욱 선호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전후 복구사업이 합판업계 성장에 분화구의 기름 역할을 하였던 셈이다. 휴전 4년만에 동명목재는 기초를 닦기 시작했고 1957년 대기업 체제로 성장하게 되었다.
4년이 지난 후, 동명목재는 국내 수요에 맞춰 규모도 확장했지만 국내의 한정된 원자재로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1959년 처음으로 열대지방의 원목인 나왕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이때에 생각지도 않게 우리 군에서 납품을 요구해 왔고 이것을 지켜본 주한 미군에서도 납품을 요청했다. 이 때부터 동명목재는 명실상부하게 정상에 오른 것이다. 1960년 가을에 미국으로부터 "귀사 제품의 합판을 수입하고 싶다"는 요청을 받았다. 강석진 회장은 물론 사원들도 깜짝 놀란 사실이었다. 미국은 주한 미군이 사용하는 합판의 질이 좋을 뿐 아니라 값도 미국산에 비해 훨씬 싼 한국산 합판을 수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동명은 국내 시장에서 수출이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게 된다.
국내 경쟁 회사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 합판업계에서는 동명이 처음으로 수출이란 낯선 영역에 서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경영진과 기술진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수출의 길은 트였으나 주문품이 너무 고급이었기 때문이다. 한번도 생산해 본 적이 없는 문짝에 사용하는 도어 스킨이었고 그것도 옹이가 전혀 없어야 하는 최고급품 DAA였다. 그당시 동명의 시설이나 기술로서는 사실상 생산이 불가능하다 할 정도의 제품이었다. 그러나 동명은 모처럼 찾아든 이 천행을 그냥 놓칠 수는 없었다. 평소 품질 향상을 위해 손수 제품 설계까지 하던 강석진 회장은 이것을 제품의 고급화와 기술 도입을 위한 최대의 호재로 생각했다. 우리보다 앞선 일본의 고급 합판 시방서를 구입하여 연구하기 시작했고 직접 제춤 생산에 참여했다. 수출용 제품의 검사를 위해 검사원을 일본에서 초빙하기까지 했다.
1961년 5월, 드디어 갖은 고생과 인내 그리고 연구의 작업 끝에 첫 수출품을 생산하였다. 동명합판 국제시장 진출을 알리는 우렁찬 뱃고동 소리가 부산항 중앙부두에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수출선의 닻이 올려지고 출항의 고동이 울려 퍼지자 그는 그야말로 감격과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이로부터 국제화는 시작되었고 한국최초로 합판의 씨를 뿌린 자리에 강석진 회장이 우뚝 서게 된 것이다. 동명이 그 해 수출한 합판은 26만 3천 달러어치나 된다. 당시의 우리 나라 수출 실적과 비교하면 그 비중은 엄청난 것이다.
그는 69년, 70년, 71년 연 3년 동안 국내 수출 최고상을 수상했고1979년까지 대통령상도 무려 20회나 받았다.
1966년 제2공장, 1967년엔 가공합판 공장과 프로마린 공장을 새로 세우는 등 1974년에 이르러 시설 확장을 마무리 지었다. 1961년 처녀 수출을 한 동명은 1964년엔 4천만 달러의 실적을 오리기에 이르렀다. 이때 강석진 회장은 대통령으로부터 수출무역진흥상을 받았다. 국내 개인 기업 랭킹 1위로 부상한 그는 또한 재계의 거물로 지목받기 시작했다. 1965년께 연간 매출액이 50억원에 달하던 것이 1970년엔 100억원, 1976년에는 5백억원대로 치솟았다. 그는 69년, 70년, 71년 연 3년 동안 국내 수출 최고상을 수상했고 1979년까지 대통령상만도 무려 20회나 받았다.
또한 수출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서 해외 지사를 두고 현장감 있게 사업 번창을 시도했다. 해외 지사는 수입부문과 수출부문으로 구분하였고, 수입부문은 홍콩, 싱가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에 그리고 수출부문은 미국, 영국,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에 두었다.
강석진 회장은 세계 최대의 합판회사를 경영하면서60년대와 70년대에서 한국 수출산업의 선구자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강석진 회장은 세계 최대의 합판회사를 경영하면서 60년대와 70년대에서 한국 수출산업의 선구자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는 1964년 11월 30일 사상 처음으로 한해 수출액이 1억불을 돌파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2년만 해도 5천5백만 불에 불과했던 수출이 2년만에 2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정부는 수출의 날을 제정하였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 중 연평균 43.8%라는 비약적인 수출증가율을 기록하였고 제2차 5개년 계획 기간이 끝나는 1971년 12월에는 연간 10억불 시대를 맞았다.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세계 수출에서 차지하는 한국의 위치는 최하위권인 70위 밖에 머물렀으나 1977년 100억불 시대가 발판이 되어 오늘날은 고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 10대 수출 상품 중 합판의 변화추이는 61년에는 8위였던 것이 70년에는 2위로 부상하였고 1975년에 4위, 1980년에 8위의 수준에 있었다.
한 국가의 수출을 주도했던 동명목재의 합판은 약 20여년 동안 10대 수출 상품의 자리를 지켜왔고, 1961년 10대 수출 상품이 합판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광석, 중석, 생사, 무연탄, 오징어, 활선어, 흑연 등 1차 산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위의 사실은 대단한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단일 품목 중 한국 최대 규모인 동명 합판이 한국 수출에 한 획을 그었다 라는 표현은 과장된 것이 아니다. 70년대에 합판, 섬유류, 신발 등을 중심으로 한 경공업제품이 수출의 주종목으로 산업구조를 변화시키는 데 동명은 선구자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세계 무역시장에서 한국의 비중도 1962년에 0.48%였으나 1978년을 기점으로 1%를 기록하는 데 성공하였다. 동명목재상사는 이제 "수출뿐만 아니라 수출이 바로 애국이다". 라는 신념을 가지면서 부국을 위해 부산 상공인의 수출시장 확대에 더욱 선도적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1968년 11월 30일 제5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대통령은 금년도 수출 유공자 및 관계업계에 노고를 치하하고 수출만이 보다 잘 살 수 있고 승공 통일의 길임을 거듭 강조하면서 금년도 수출진흥 및 외화획득에 공이 많은 동명목재 강석진 사장에게 우리 나라 최고의 금탑 산업훈장과 우승기를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