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상공회의소 회장
57년 1월에 제2대 의원선출(회장 신덕균), 60년 1월에 제3대 의원선출(회장 신덕균), 61년 7월에 제4대 의원선출(회장 신중달), 67년 8월에 제6대 의원선출을 하고 강석진 회장을 상공회의소 회장에 선출했다. 그는 1967년 8월부터 1976년 6월까지 6,7,8대 부산상공회의소 회장과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0여년간 회장 역임과 제4대 회장 잔임기간까지 합하면 4기에 걸친 최장수 회장이다.
姜錫鎭 회장이 재임하는 동안 부산 상공업계는 많은 격동에도 눈부신 활동도 많았다. 67년 9월 신창동 청사에서 대교동 청사로 옮기기까지의 혼란과 약진 속에 상의는 고난과 시련을 딛고 새로운 국제화시대에 대비하는 자세를 확립했다. 당시 화재로 소실되었던 부산상의 건물은 부산은행에 매각하고 부산시 소유이던 제5육군병원 건물을 4천 7백만원에 매입, 설계를 직접 지휘하여 자비로 보수하여 부산상의 건물로 꾸몄다.
그는 부산상의 상임위원으로 있던 57년 부산상의 건물(현재의 부산은행 신창동지점) 매입 대금을 쾌적한 적이 있었고, 67년 9월 대교동 청사로 이전한 후 상의의 활동은 더욱 눈부셨다. 신창동 청사시대에 다진 실력을 바탕으로 국내외에 상의의 역량을 과시하였다. 강석진 회장 제재하에 6,7,8대의 의원부와 사무국은 한 덩어리가 되어 상공업계의 애로사항 타개는 물론 지역개발의 선도적 역할, 국가경제 발전을 위한 1-3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인 추세에 크게 기여했다.
67년 10월 25일에 개관한 수출진흥센터 내의 수출품 전시장, 우량 국산품 직매장의 효율적인 운영을 비롯하여 각종 조사 통계 및 상공업 진흥등상의 본연의 일반업무 외에도 시장 현대화 사업으로 대구은행에 이어 지방은행 제2호인 부산은행, 부산투자금융을 설립하였고 동광동시장을 7층 규모의 부산데파트 건립, 부산탑 건립, 부산항 부두관리협회 창설 추진, 국제화를 위한 부·관훼리호 취항 추진, 새 부산역사 건립추진을 위한 10만명 서명 건의, 부산고법·고검 설치 추진, 중소기업 수출 대행 기구인 부산무역진흥상사 설치, 대교동 철강 육교 준공 개통, 부산지방 수출품 상설전시관 설치운영, 부산지역 경제전문지 및 지역경제인 정보지로서 「부산상의」뉴스 발간과 「부산상공」발간, 부·관 친선 육상경기대회 개최, 수출 증진을 위한 각종 해외부문의 효율적 추진, 공장 새마을운동의 선도적 역할 등 지역 상공업 발전과 국가경제 발전이란 벅찬 당면 문제 등을 수행하는 데 혼신의 정을 쏟았다.
부산데파트 건립은 항도 부산의 상공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계기를 더욱 굳혔다고 하겠다. 사실 이 부산 데파트의 개장은 부산의 상가 조성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부산진, 범천, 초량, 부전, 부평, 온천 등 8개 시장이 민영화와 더불어 현대화하게 되었다. 범천 시장은 기공식을 했고 부산진 시장은 1968년 10월 20일 초량 가설시장으로 이전 곧 현대화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1963년 1월 1일 부산시는 부산직할시로 승격하게 되었다. 이것을 기념하고 무한히 발전하는 부산이 되기를 염원하기 위해 1963년 12월 14일 부산 서면로타리에 부산 탑을 강회장이 직접 디자인 제작하여 제막식을 가졌다. 부산을 나타내는 상징탑 중앙 위치에는 정의 정신의 횃불을 높이 치켜든 청년 남녀상이 조각가 박칠성 씨에 의하여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이 기념물은 1980년 부산 지하철 1호선 건설공사로 인하여 철거됨에 따라 동상부분은 현재 부산시립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69년에는 산업합리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산업합리화는 바로 국제 경쟁력 강화와 직결되는 것이므로 부산상의는 이 운동의 효과적인 전개를 위하여 기업경영면의 불합리한 요인을 조사 분석하여 합리화의 방향을 제출하는 한편, 대한상의 내에 부설된 산업합리화 운동 본부요원으로 하여금 부산의 대표적인 기업체 등의 경영 진단을 실시하게 하였다.
또한 부산에도 증권시장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한국증권 부산지소의 개소식을 가지는 등 부산지방 금융활성화 정책에 주력하였다.
1970년에 들어서면서 지방상공업 육성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각 상공인들에게 기능 발휘에 총력을 집중할 것을 당부하고 세금, 금리 경영에 있어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연구를 하여 경제성장에 이바지하고 70년도 10억달러 수출목표에 전력을 강구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부산상공회의소회장 재임시에 국민총화를 바탕으로 국가, 사회, 기업, 가정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질서 속에서 분발과 노력 새로운 결의를 굳게 하여 번영된 국가, 밝은 사회를 이룩하도록 온갖 힘을 기울였다.
강회장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서민적이고 또 철저하게 내핍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상의 회장 당시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사재를 털어 직원들에게 특별 상여금을 줄 정도로 기분파이기도 하였다. 69년도 상의 직원 급여 인상이 어려울 때 대기업 수준으로 인상하고 부족부분은 본인이 충당하겠다고 하여 직원 대우를 정상에 올린 적도 있었다. 그는 부산상의 재정이 어려웠던 초창기 시절, 동명에서 급한대로 입체하면서 부산상의를 운영하기까지 했던, 향토기업인으로서 역할을 지나칠 만큼 충실히 해낸 사람이다.